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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군관학교 출신들, 정권의 중추로
[박정희는 누구인가 2] 민족을 배반하고 황국신민, 황군장교의 길 택해
기사입력: 2005/12/14 [01:22]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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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쿠데타 44해를 맞은 2005년 5월 16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 걸린 박정희의 모습.     ©이철우 기자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는 지난 7일 박정희 정권시절 대표적 공안사건으로 조작논란이 끝이지 않았던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과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 사건이 ‘학생시위로 인한 정권의 위기상황 속에서 대통령과 중앙정보부장이 사건의 실체를 매우 과장되게 발표한 사건’이라며 정권에 의한 조작임을 발표했다.

<참말로>는 그동안 친일청산과 역사 바로 잡기에 헌신적 노력을 해온 한상범(대통령 소속 전 의문사진상규명위원장) 교수의 <박정희는 누구인가?>를 79년 유신을 마감한 10.26에 이은 또 다른 군사독재정권의 시작인 12.12사태에 즈음해 6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2.출세지향과 민족배반 - 시대 불운과 황국신민, 황군장교의 길
 
1) 박정희가 사회인이 되는 일제시절

▲박정희의 종말과 잔재를 깨야 되겠다는 메시지를 담은 깨진 그림과 장례장면.도서출판 <시대의 창> 글 백무현, 그림 박순찬- 만화 박정희.     ©만화 박정희
박정희가 일제하에서 사범학교를 힘들게 나와서 초등학교 교원을 천직으로 알고 살았다고 하면 그의 살아 온 길은 달랐을 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다.

빈농에 가까운 가정인 박정희 집안의 형제는 그의 둘째형 박상희처럼 신간회의 독립운동노선에 찬성하고 나름대로 살려고 하고, 결국 해방정국에서 남로당원이 되어 미군정에 대항하다가 총살당한 사람도 있다. 박정희가 그 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보지만, 그는 일제하에서 결국 교원생활을 때려 치고 ‘긴 칼을 찬’ 출세를 위해 만주지역(중국동북)으로 간다.

만주에는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제국주의가 일찍이 만주철도의 이권을 장악해 군대를 주둔시켰고, 1931년 만주사변이라 하여 만주침략에 본격으로 나섰다. 

1932년에는 ‘만주국’이란 일본관동군이 관리, 통제하는 괴뢰정권을 수립하였다. 이 괴뢰정권의 장교양성기관인 신경군관학교는 일본육사의 식민지 분교 격으로 박정희는 용케 이 신경군관학교 입학에 성공, 일본육사로 편입하여 일본제국하의 장교가 된다. 

신경군관학교 입학에도 그의 나이가 지원적령기를 초과했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추천과 이면 배려가 있었다. 특히 그는 혈서지원으로 일본 왕에게 '진충보국(盡忠報國)'을 맹서하여 소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말은 박정희의 전기의 일종인 최상천의 ‘알몸 박정희’에도 나온다. 그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그 이후 박정희의 행각을 보면 일본제국의 충성을 다하는 친일파가 된 것만은 확실하다.

여기서 이원섭이 쓴 글인 ‘황군장교 박정희의 꿈’에서 일부 인용해 참조한다.

“ ~ 다른 문제는 제쳐놓고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자. 일제시대 ‘황군’장교로 복무한 것만으로도 그는 국고로 기념관 건립을 지원할 만한 인물이 못 된다. 대구사범을 나와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있다가 일본제국의 중국침략기지인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반민족적이다.

‘진충보국 멸사봉공(충성을 다하여 나라(일본)에 보답하고, 나를 죽여서 국가를 받들겠다)’이란 혈서를 써 보내는 남다른 충성심을 과시한 끝에 ‘만주일보’에 크게 나고 입학에 성공했다. 사관생도 자질을 인정받아 일본육사에 편입하고 임관 후 독립군 토벌에 앞장선 그의 이력은 몹시 부끄러운 것이다. 조국 독립에 목숨을 바친 선열을 생각하면 더욱 할 말이 없다”
(한겨레, 2001년 5월 11일 이원섭 칼럼에서 인용)
 
1931년은 일본제국주의가 1945년 패전하기까지 15년 전쟁의 시작이 된 때이다. 이때에 박정희는 일본군국주의 침략정책에 편승한 것이다. 1937년에는 중일전쟁에 이어 1941년에는 진주만 기습으로 영.미에게 선전포고한다.

이 1930년대 중반기부터 조선내외 친일파가 극성을 떨고 조선안의 이른바 인텔리와 유지 그리고 기업가들이 자발이든 타율이든 친일매국의 길로 들어선 저주받은 시절이다.

특히 박정희가 택한 중국 동북지방인 만주는 연변(간도)으로 불리며 조선인이 일찍부터 정착해 사는 지역으로 조선인의 활동이 활발하던 지역이다.
일본 제국군대 출신들, 정권의 중추가 되다

박정희가 나온 만주군관학교는 이한림·강문봉·정일권·백선엽 들이 나왔다. 일본 제국군대 출신 인맥이  박정희 정권의 중추가 되었다. 그밖에도 ‘만주대동학원’이란 만주고등관리 양성기관은 박정희 밑에서 외무장관과 총리까지 올라가 박정희 피살 당시 총리로서 대통령 대행을 한 최규하가 나왔다.

만주건국대학에서 최남선은 교수가 되었고 그 학교를 나온 사람으로서 강영훈은 국무총리를 역임했으며 그는 지금도 최남선을 민족지도자로 변명한다.

강영훈은 인터뷰에서 "최남선은 조선민족의 장래를 위해 조선청년의 일본군대 지원을 권장했다"고 말했다.(2005년 9월 18일 추석날 방영한 만주친일파 등을 다룬 밤 9시 국정 텔레비전.)

이선근과 같은 친일파는 만주에서 ‘만몽논장’을 하면서 오족협화회(五族協和會) 대의원과 사무국장으로서 관동군에 군량미 비용으로 거금을 바쳤다. 이 기사는 사진과 함께 당시의 만선일보(滿鮮日報)에 게재될 정도로 유명했다. 그는 열성친일파로 박정희 집권 후에 그의 측근을 맴돌며 온갖 행각을 벌리고 전두환 집권 후에도 계속 전두환 찬양의 추태를 보인다.   

당시 분위기가 너도 나도 변절 투항을 해서 안일을 택하는 친일파가 번성하던 때이고 한편으로는 항일노선을 지켜내기 어려워서 결국 정절을 굽히고 민족노선을 배반하는 변절의 길을 택하는 이탈자도 나오고 있었다.

물론 박정희는 변절 전향이 아니고 출세를 위해 친일노선을 걸어간 자발적 친일로 간 매국노였다.

박정희의 해방 전 행적
 
박정희는 신경군관학교에서 일본제국에 대한 열성과 충성이 인정되어 일본육사에 편입해서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박정희의 연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박정희 연보 -
 1917년 경북 선산출생
 1925년 구미보통학교 입학
 1932년 대구사범입학. 이 해에 일본제국의 괴뢰정권 만주국수립.
 1935년 5월 만주수학여행. 일본제국 지배 때 만주견문. 같은 해 김호남과 결혼.특히 당시 박정희는 성적불량으로 낙제를 겨우 면함.
 1937년 대구사범 졸업 후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부임. 같은 해 큰 딸인 박재옥 출생
 1939년 교직을 떠남
 1940년 만주신경군관학교 입학(혈서지원으로 특혜 입학 허용).
 1942년 만주군관학교에 일제에 대한 충성을 인정받고 일본육사 3년 편입
 1944년 일본육사 졸업 후 만주군 보병 제8단 배속, 중국항일군토벌종사.
 1945년 일제패망, 만군이탈, 북경에서 조선인 광복군에 편승, 이 당시부터 친일행적 은폐
 1946년 귀국 조선국방경비대 입대, 소위 임관


 (2) 해방 전과 해방 후 박정희의 처신과 행적

재미 원로기자인 문명자가 쓴 ‘박정희와 김대중(월간 말지 발간)’을 보면 박정희는 항일군 토벌을 나가게 되면 신이 나서 일본도를 움켜쥐고 “요오시~ 요오시~”하고 별렀다고 한다.

일본말로 “요오시”란 말 뜻 자체는 “옳지”하는 정도이나, 쓰는 분위기에 따라 마음먹은 일을 벼르는 의지를 나타낼 때도 있다. 그가 울적한 채 말이 없다가도 항일군 토벌에는 의욕과 열기를 내보였다고 하는데 자세한 것은 더 알기 어렵다.

물론 박정희의 친일행각에 대해선 그나 그가 집권한 후에 그를 보좌하는 기관에서 의도적으로 말소해서 남아있는 자료가 찾기 힘들다. 김형욱 회고록에는 박정희가 집권한 후에 내무부 치안국 정보과가 관리하는 파일에 박정희의 남조선 노동당 전력에 대한 자료를 말소하려고 정보부까지 동원했으나, 결국 기록 말소에는 실패했다고 한다. 지금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아보고 싶다.

1941년 박정희는 스스로 일본 이름인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하여 명실상부한 일본제국군대의 장교로서 면모를 갖추고 일본의 대륙침략전쟁에 가담한다. 자발적 친일매국행각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나는 이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박정희의 정신구조가 골수까지 친일 황국사관에 물들고 일본정신을 숭배 추종하고 일본의 군관학교 선생이나 만주국주둔 관동군 참모 ‘세지마류조(瀨島龍三)’나 만주국 고위간부로 나중에 전범이 된 ‘기시노부스게(岸信介)’ 들을 철저하게 숭배 추종하는 점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는 평생 일본 제국군인의 정신으로 살았다.

“박정희는 인권과 민주주의는 꿈에도 믿지 않은 사람이다. 그는 대통령 재임 때도 일본 군가를 열창하고 일본의 극우 수구 인사와 접촉해 그들의 지도 자문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청와대 뒤뜰을 일본 관동군 기마승마복을 입고 거닐 정도로 일제관동군 장교(소위 나중에 중위?)시절을 그리워 한 사람이다(중앙일보사, ‘청와대 비서실’ 참조).

그러한 박정희의 행적은 공인으로서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는지 문제가 되는 것이다.(계속)

한상범 동국대 명예교수 지난 2002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으며 최종길 교수 살해사건과 비전향장기수 옥사 사건에 대한 의문사 인정을 비롯해 인권과 민주주의 신장, 과거청산에 기여해 왔다. 그는 1964년 한일협정반대교수단 서명을 시작으로 저술 등을 통해 과거청산 작업을 벌였다. 1991년에는 ‘한국 법 학계를 지배한 일본 법학의 유산’을 역사비평에 발표해 일제잔재 청산문제를 공식 제기했다.

쓴 책으로는 <사상을 벌주는 나라>, <인권-민중의 자유와 권리>, <화 있을진저 너희들 법률가여>, <금서 세상을 바꾼 > 을 비롯해 수십 권이 있으며 <일제잔재 청산의 법이론>으로 외솔상을 수상했고 <한국의 법문화와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로 현암법학저작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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